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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삼의사 숭고한 희생정신
글쓴이 관리자
글쓴날 2013-04-08
일제침략에 항거하여 한국독립운동에 앞장 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인을 삼의사라 부른다.
서울 효창공원의 북쪽 동산위에 김구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아래쪽 동산 왼쪽에 유해를 찾지 못해 비어있는 안중근의사의 가묘가 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묘(三義士墓)가 옆에 나란히 있다.
삼의사는 일본 땅에서 처형,순국하여 일본에 묻혀있었다. 성공과 실패가 있었지만 한인애국단의 소속 삼의사의 공적을 인정한 김구는 해방되자 일본유해발굴과 유해송환에 앞장서 왔다. 1946년 해방이 된 이듬해 우리나라 첫 국민장으로 엄수하고 효창공원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이날 국민장에는 좌우사상과 이념, 정당과 정파를 초월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치른 행사였다.
삼의사의 활동 시기는 1930년 초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활동했다. 그 당시 우리임시정부의 존재를 중국에서 안정하지 않는 시기였다. 김구가 주도한 한인애국단의 소속 삼의사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활력을 되찾게 했다.
침략전쟁이 자행되고 있는 동안 식민지시대의 비인간적인 만행과 침략전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등 불의의 책임자는 일본천황이었다.
1932년 1. 8일 히로히또가 도쿄교외에서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올 때 이봉창은 수류탄을 투척했다. 불행하게도 근위병만 부상을 입히고 히로히또 천황을 죽이지 못했다. 품안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 만세'를 3번 부른 뒤 체포되었다. 그해 10월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날 거사를 성공을 하지 못했으나 한국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세계에 표명했다.
1932년 백정기는(당시37세) 윤봉길의사와 같은 날 똑 같은 목적으로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의 일본 천장절 경축식장 폭파계획을 세우고 행사장에 입장권구입을 전달 받지 못해 폭파계획이 실패로 끝났다.
윤봉길의사 보다 먼저 성공했다면 백정기의사 성공에 가려 윤의사의 성공은 반감될 뻔했다.
삼의사(三義士)는 생전에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항일의거를 일으켰다. 우리민족의 항일기상을 세계에 알렸다. 구천의 영혼이 되어서도 우리계례의 마음을 하나로 합쳐 단결하도록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삼의사 중 윤봉길 백정기는 항일의거 80주년과 순국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우리고장 출신 윤봉길의사는 충의사와 유물기념관이 덕산면 시량리에 건립되어 위업선양에 앞장서고 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이시카와현 지방본부 건물에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내년에 설립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백정기의사도 정읍시 영원면에 1996년 기념관이 건립되어 (사)구파 백정기의사 기념사업회가 많은 활동을 해오고 있다.
서울 출신 이봉창의사는 미혼으로 후손이 없어 추모사업과 성역화가 앞서 거론한 윤봉길 백정기의사에 비해 다소 미약하다.
우리들은 삼의사의 의거 성공을 잣대 삼기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지 말아야한다.
글쓴이 김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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